이사장 인사말
이사장 인사말
2021년도 4월부터 학원밀알장학재단 이사장을 맡게 된 10기 김윤명(金允溟)입니다. 저에게는 분이 넘치도록 영광스러운 자리이지만 아울러 큰 짐을 메고 가는 느낌입니다.
학원밀알장학재단의 역사를 회고해 보면, 김익달 선사님께서는 1916년 소백산맥 첩첩산중에 낙동강의 작은 지류가 흐르는 경북 상주군 화서면 중문리에서 출생하셨습니다. 해방 전 일본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시며 출판인의 꿈을 세웠고, 폐결핵 치료를 위해 귀국한 후 건강을 회복하자 황해도 해주에서 1941년 ‘낙동서관’이라는 서점을 열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가족과 함께 대구로 월남하여 노점에서 책과 신문을 팔아 모은 밑천으로 낙동강물이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에서 ‘대양(大洋)출판사’를 설립하였습니다. 1947년에 사옥을 서울 을지로4가로 이전했으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신생 독립국에서 1950년 다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남북으로 갈린 동족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은 피난지 천막학교에서 책상과 의자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교재도 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공부해야 했습니다. 전쟁의 와중에 대양출판사는 1952년 학원사로 개칭하며 재단법인 학원장학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김익달 선사님께서도 피난민 처지였지만 국가의 미래가 어린 학생들에게 달려 있다고, 강조하면서 청소년 잡지 ‘학원’을 창간하였습니다. 또 그 창간호에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학원장학회’설립과 장학생 모집공고를 냈습니다. 1952년 11월, 그의 나이 36세 때입니다. 그해 11월 1일 ‘학원(學園)’ 창간호를 통해 학원장학생 선발을 홍보한 후 1953년 2월 22일 ‘가난하지만 공부 잘하는’ 중3 학생 12명을 대구에서 학원장학회 제1기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납부금 전액을 지급하셨습니다.
선사님 덕분에 1,000여명의 우리 학원 밀알회원들이 사회 각계 각층에서 열심히 일하게 되었습니다. 선사님은 사업이 어려울 때에도 장학 사업을 중단하지 않고 빚을 내서라도 장학금을 지급하셨습니다. 1985년에 별세하신 후에는 장남인 학원사 김영수 사장께서 선사님의 유지를 받들어 장학 사업을 이어왔습니다. 한편 ‘나에게 고마워하지 말고 너희들처럼 어려운 학생들을 한사람이라도 더 공부하도록 도와주라’고 하셨던 말씀에 따라 학원장학금을 받았던 장학생들이 장학기금을 마련하여 1997년 밀알장학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2005년 1월 두 재단을 통합한 학원밀알장학재단이 탄생하였으며 지금까지 학원장학회 정신과 방식을 계승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장학금 수혜를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장학재단을 만들어 장학 사업을 이어가는 것은 우리가 처음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고 자랑스럽습니까?
COVID-19로 일시 중단되었던 신입 장학생 선발도 확정된 사업시행세칙에 여러 학원밀알회원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하여 훌륭한 밀알 새싹을 중단없이 매년 선발해 나가고 있습니다.
학원장학회 설립 이후 70여년이 지난 지금 장학사업의 환경은 크게 변하였습니다. 1950년대에는 공부는 커녕 먹고 살기도 빠듯했지만 2021년 신입 고1학년생들부터는 국공립 구별 없이 전원 무상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학재단의 운영에도 시대의 환경에 맞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최근 수년간 재단의 재정적인 여건도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전임 이사장께서 추진한 CMS 계좌이체에 의한 모금방법이 잘 정착되어 가고 있으며, 학원사 부사장 겸 편집주간이셨던 최덕교 선생께서 장학재단에 남겨주신 부동산 임대수입도 꾸준히 들어오고 있으나 재단의 큰 수입원이었던 정기예금 이자수익이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그 대안을 신중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회원 여러분들의 큰 정성을 바탕으로 학원밀알장학재단이 건재할 수 있었기에 그동안 헌신해 오신 모든 회원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학원밀알장학재단의 역사를 회고해 보면, 김익달 선사님께서는 1916년 소백산맥 첩첩산중에 낙동강의 작은 지류가 흐르는 경북 상주군 화서면 중문리에서 출생하셨습니다. 해방 전 일본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시며 출판인의 꿈을 세웠고, 폐결핵 치료를 위해 귀국한 후 건강을 회복하자 황해도 해주에서 1941년 ‘낙동서관’이라는 서점을 열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가족과 함께 대구로 월남하여 노점에서 책과 신문을 팔아 모은 밑천으로 낙동강물이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에서 ‘대양(大洋)출판사’를 설립하였습니다. 1947년에 사옥을 서울 을지로4가로 이전했으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신생 독립국에서 1950년 다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남북으로 갈린 동족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은 피난지 천막학교에서 책상과 의자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교재도 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공부해야 했습니다. 전쟁의 와중에 대양출판사는 1952년 학원사로 개칭하며 재단법인 학원장학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김익달 선사님께서도 피난민 처지였지만 국가의 미래가 어린 학생들에게 달려 있다고, 강조하면서 청소년 잡지 ‘학원’을 창간하였습니다. 또 그 창간호에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학원장학회’설립과 장학생 모집공고를 냈습니다. 1952년 11월, 그의 나이 36세 때입니다. 그해 11월 1일 ‘학원(學園)’ 창간호를 통해 학원장학생 선발을 홍보한 후 1953년 2월 22일 ‘가난하지만 공부 잘하는’ 중3 학생 12명을 대구에서 학원장학회 제1기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납부금 전액을 지급하셨습니다.
선사님 덕분에 1,000여명의 우리 학원 밀알회원들이 사회 각계 각층에서 열심히 일하게 되었습니다. 선사님은 사업이 어려울 때에도 장학 사업을 중단하지 않고 빚을 내서라도 장학금을 지급하셨습니다. 1985년에 별세하신 후에는 장남인 학원사 김영수 사장께서 선사님의 유지를 받들어 장학 사업을 이어왔습니다. 한편 ‘나에게 고마워하지 말고 너희들처럼 어려운 학생들을 한사람이라도 더 공부하도록 도와주라’고 하셨던 말씀에 따라 학원장학금을 받았던 장학생들이 장학기금을 마련하여 1997년 밀알장학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2005년 1월 두 재단을 통합한 학원밀알장학재단이 탄생하였으며 지금까지 학원장학회 정신과 방식을 계승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장학금 수혜를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장학재단을 만들어 장학 사업을 이어가는 것은 우리가 처음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고 자랑스럽습니까?
COVID-19로 일시 중단되었던 신입 장학생 선발도 확정된 사업시행세칙에 여러 학원밀알회원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하여 훌륭한 밀알 새싹을 중단없이 매년 선발해 나가고 있습니다.
학원장학회 설립 이후 70여년이 지난 지금 장학사업의 환경은 크게 변하였습니다. 1950년대에는 공부는 커녕 먹고 살기도 빠듯했지만 2021년 신입 고1학년생들부터는 국공립 구별 없이 전원 무상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학재단의 운영에도 시대의 환경에 맞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최근 수년간 재단의 재정적인 여건도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전임 이사장께서 추진한 CMS 계좌이체에 의한 모금방법이 잘 정착되어 가고 있으며, 학원사 부사장 겸 편집주간이셨던 최덕교 선생께서 장학재단에 남겨주신 부동산 임대수입도 꾸준히 들어오고 있으나 재단의 큰 수입원이었던 정기예금 이자수익이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그 대안을 신중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회원 여러분들의 큰 정성을 바탕으로 학원밀알장학재단이 건재할 수 있었기에 그동안 헌신해 오신 모든 회원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